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된장.

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2년의 국가 교육 과정을 마쳤다.
뭣도 모르는 낭랑 18세였다. 학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좋았다. 그랬다.
이제 더이상 책상에 처박힐 일은 없다. 그렇게 살 작정이었다.

오지게 마셨다. 객기도 부리고. 파출소,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대학생의 특혜를 누렸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돈 걱정은 없었다. 등록금도 생활비도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당연하게 받았다.
그저 매일같이 알콜에 쩌들어 살았다. 낭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세상은 저만치 달라졌지만 여전히 불공평했다.
낮에는 치열한 척 아스팔트 위를 달리거나.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들이켰고.
밤에는 쐬주병을 들고 다녔다. 그게 나라를 위한 20대의 할 일이라 믿었다.

그 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의에 맞서고. 몰상식을 부수고.
미국놈들 나쁜놈들. 스스로 특혜받는 대학생이면서
기득권에 취한 채 권력과 위정자들을 혐오했다. 세상을 바꾸려 했다.

1995년, 군대. 잘 적응했다. 살기 위해서.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믿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휴가 나와서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후배들을 다그쳤다. 뭐하냐고.
그 사이 세상은 저만치 갔다.

1997년, 한창 유행하던 어학연수를 떠났다.
1998년 IMF가 터졌지만 몰랐다. 시애틀서 개고생하며 딴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 도움 없이 버티고 있었다. 뿌듯했다. 병신같이.
차라리 그 때 제대로 도움을 받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같잖은 자존심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돌아왔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002년 대학생활을 10년 채웠다. 그 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불공평했고 불합리했다. 개혁과 혁신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쐬주만 부어 제끼면서. 가끔 양주도.

30대. 결혼. 아이. 삶. 이민. 취업.

달라졌다. 외연이. 직장인이 되었다. 우연한 행운으로 들어간 회사, 역시 기득권에 속했다.
나의 지식보다는 나의 지위가 무기가 되었다. 자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몰랐다. 취해 있었으니까. 여전히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자판을 두드리며 계몽해야 될 무리들을 상상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무지몽매한 군상들을 깔아보고. 부를 거머쥔, 사회적으로 성공한 무리들에게는 일이라는 명목으로 친교를 강요하고.
거슬리는 것들은 자판으로. 사이사이 사회를 위해 커뮤니티를 위해 일한다는 위로도 하면서.

2009년, 그 때 정신차렸어야 했는데. 5월 23일, 여전히 취해 있었다.
세상을 바꿔야겠다며 뜨거운 눈물로 쐬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된장.

2017년. 세상이 달라졌다. 바뀌었다.
2020년. 상식이 권력을 잡았다.
투표는 하지 못했다. 코로나때문에.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십, 반백을 바라보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과거를 돌아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되는가.
뭐라도 해야 되는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
생각은 많고.
불안하고. 걱정도 많고. 불만도 불평도 많고.

얼마나 남았을까. 반백을 채워야 되나. 채울 수 있을까.
시한부 삶인 것은 분명한 데. 마지막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변명하고 또 미뤄본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까 불안한가.
그런가. 걱정만 하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겠지.
된장.

달라질까? 달라져야 되나? 뭔가를 해야 되나?
그래야 되나?
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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